철학자와 늑대

🔖 일화 기억은 날갯짓에 불과하며 항상 우리를 배반한다. 우리의 일화 기억은 수십 년에 걸친 연구에서 공통적으로 밝혀졌듯이 가장 좋았던 시간에는 특히나 신뢰성이 떨어지며, 우리 뇌 기능이 약화되면서 가장 먼저 사라지는 기억이다. 이것은 마치 멀리 갈수록 사라지는 새의 날갯짓과 같다.
그러나 누구도 이름을 불러 준 적 없는 훨씬 심오하고 중요한 기억의 방식이 있다. 각자의 개성에, 그리고 그 개성이 발현된 삶 속에 깊이 새겨진 과거의 기억이다. 대부분 사람들은 이러한 기억을 모른다. 보통 의식할 수 있는 종류의 기억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기억들은 우리 자신을 형성한다. 우리가 내리는 결정, 취하는 행동, 그 결과 살아가는 삶 속에 드러난다.
우리 곁을 머물렀던 사람들에 대한 기억은 의식적으로 기억하지 않아도 우리의 생활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 있다. 우리의 의식은 변덕스럽고 기억이라는 임무를 행할 만한 자격이 없다. 누군가를 기억하는 가장 중요한 방법은 그들이 형성하도록 도와준 나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 영장류는 어둠의 복수를 계획하기 위해 황급히 달아날 것이고, 자신보다 강하고 자신을 모욕한 자들을 약화시킬 방안을 모색할 것이다. 그 작업이 끝나면 악은 실행될 수 있다. 나는 우연히 태어난 영장류다. 그러나 나는 자기를 땅바닥에 메다 꽂은 불독에게 저항하며 낮은 신음 소리를 내는 새끼 늑대에게서 최고의 나를 발견 한다. 신음은 고통이 다가옴을 예견하는 것이며, 고통은 삶의 본질이다. 그것은 내가 새끼 늑대 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깨달음이고 삶이라는 불독이 언제든지 나뭇가지처럼 나를 부러뜨릴 수 있다는 깨달음이다. 그러나 동시에 결코 물러서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명이기도 하다.
신념이 강하다는 면에서 보통과는 다른 독특한 철학자 동료가 있었다. 그는 항상 학생들에게 '오물이 튀어 봐야 믿는다'고 말하곤 했다. 아마 그럴지도 모른다. 사고가 터져 봐야 사람들은 신을 찾는다. 사고가 터질 때 나는 작은 새끼 늑대를 생각한다.

🔖 이렇게 다양하며 이질적이고 분열된 감정은 모두 필리아를 나타낸다. 그러나 이러한 감정이 곧 사랑은 아니다. 필리아는 상황에 따라 너무나 다양한 감정이 동반되기 때문에, 그 어느 일면에 동일시될 수 없다. 더 나아가 필리아는 그러한 감정들 없이도 존재할 수 있다.
사랑에는 여러 얼굴이 있다. 사랑한다면 그 모든 것을 볼 수 있을 정도로 강해져야 한다. 본질적으로 필리아는 우리가 인정하고 싶어 하는 것보다 훨씬 가혹하고 잔인하기에. 필리아의 꼭 한 가지 필요조건은 감정이 아닌 의지이리라. 동료에게 느끼는 사랑인 필리아는 그에게 무언가를 해 주려는 의지이다. 정말 그러고 싶지 않아도, 그로 인해 소름 끼치고 메스꺼워져도, 결국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대가를 치를지라도 그렇게 하려는 의지 말이다.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는 그것이 그에게 최선이자 나의 의무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런 경험을 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항상 준비해야 한다.
사랑은 때때로 아프다. 사랑 때문에 영원히 저주받을 수도 있다. 사랑은 당신을 지옥에 떨어뜨릴 것이다. 하지만 운이 좋으면, 정말 행운을 만난다면 사랑은 당신을 지옥에서 건져내 줄 것이다.

🔖 인간에게 순간만으로 완전한 그런 순간이란 없다. 인간의 모든 순간들은 불순물이 첨가되어 있다. 과거에 대한 기억과 미래에 대한 기대로 순간들은 혼탁해져 있다. 우리 삶의 매 순간마다 시간의 화살은 우리를 창백하게 하고 죽게 한다. 그런데 인간은 이런 우리가 다른 동물들보다 더 우월하다고 믿는 것이다.
(...)
하지만 만약에 시간이 직선이 아니라 둥근 원이라면, 그리고 우리의 삶이 끝없이 반복된다면 삶의 의미는 직선 위의 결정적 지점을 향해 진행한다고 볼 수 없다. 결정적 지점은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에 상응하는 직선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순간들은 흘러가 버리지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로 끊임없이 재현되고 있다. 순간의 의미는 직선 상의 지점에 있지 않으며, 전후에 오는 사건들과 연관되어 규정되는 것이 아니다. 그 순간에는 과거의 얼룩도 없고 미래의 유령도 없다. 각 순간은 그 순간의 것이다. 모든 순간은 그 자체로 완전하다.
그렇다면 이제 삶의 의미는 꽤 달라진다. 지금껏 일직선상의 어떤 결정적인 점 또는 부분에서 삶의 의미를 찾아 왔다면, 이제부터는 삶의 의미를 순간에서 찾을 수 있다. 물론 모든 순간은 아니고 특정한 순간들일 것이다. 삶의 의미는 삶 전체에 걸쳐 분포되어 있다. 추수철 노크더프의 보리밭에 흩어져 있는 보리알처럼 말이다. 삶의 의미는 그 최고의 순간에서 찾을 수 있다. 이 순간들은 그 자체로 완전하며, 의미나 정당한 이유를 위해 다른 순간들이 필요하지도 않다.
내가 브레닌과 보낸 마지막 한 해 동안 배운 것이 하나 있다면, 늑대와 개는 인간이 통과할 수 없는 형식으로 니체의 실존 실험을 통과할 수 있다는 것이다. (...) 인간들의 삶은 상실이라는 상vision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다. 그래서 시간의 화살은 우리에게 공포와 매력을 동시에 느끼게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새롭고 평범하지 않은 것으로부터, 그리고 화살의 경로에서 벗어나는 어떤 작은 일탈에서라도 행복을 찾으려고 한다. 우리의 반항은 아무것도 아닌 헛된 꿈틀거림에 불과할 수도 있지만,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우리의 시간관념은 우리에게 내려진 저주이다. 비트겐슈타인은 미묘하게, 그러나 결정적으로 틀렸다. 죽음은 삶의 한계가 아니다. 나는 항상 죽음을 등에 업고 다녔다.
늑대의 시간은 내가 추측하건대 일직선이 아닌 둥그런 원을 그릴 것이다. 그들 삶의 각 순간들은 그 자체로 완전하다. 그들에게 행복이란 항상 똑같은 것이 영원히 반복되는 것이다. 만약에 시간이 원이라면 그곳에 '다시는 없으리'라는 개념은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그들의 존재도 삶은 상실의 과정이라는 상으로 구성되어 있지 않다. 브레닌과 함께한 마지막 해, 우리 삶을 관통했던 규칙성과 반복성은 영원회귀를 아주 잠시라도 맛볼 수 있게 해 주었다. 우리의 끝나지 않는 여름 속에는 '다시는 없으리'라는 개념도, 상실이라는 개념도 존재하지 않았다. 늑대나 개에게 죽음이란 정말로 삶의 한계라고 할 수 있겠다. 바로 이런 점 때문에 죽음은 그들을 지배하지 못한다. 그래서 나는 이것이 늑대나 개의 본질이라고 믿고 싶다.

🔖 희망이란 인간 실존의 중고차 판매원이다. 너무나도 친절하고 너무나도 그럴듯하지만 결코 신뢰할 수 없다.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닥난 희망 끝에 남겨진 내 자신이다. 결국 끝에 가서는 시간이 우리의 모든 것을 앗아 갈 것이다. 우리가 우리의 능력과 성실함과 행운으로 이루어 낸 모든 것들은 결국 다 사라지고 만다. 시간은 우리의 힘·욕망·목표·계획·미래·행복과 결국에는 희망까지 앗아 갈 것이다. 시간은 우리가 가질 수 있는, 소유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우리로부터 앗아 갈 것이다. 하지만 최고의 순간에 실재하는 내 모습만큼은 시간이 결코 앗아 갈 수 없다.
(...)
브레닌을 묻던 밤, 랑그도크 지방의 살을 에는 추위와 장례식용 모닥불에서 번지던 밝은 빛의 온기. 그 안에서 인간 조건의 근원을 찾아본다. 선택이 가능하다면 누구나 희망을 주는 따스하고 너그러운 삶을 택할 것이다. 다른 편을 택한다는 것은 미친 짓일 것이다. 하지만 그런 시간이 당도한다면 늑대의 냉정함으로 살아나가야 한다. 힘들고, 차갑고, 우리를 움츠러들게 하는 삶을 살아 내야만 하는 순간들이 찾아온다. 바로 이 순간들이 삶을 가치 있게 만든다. 결국 우리의 담대한 도전만이 우리를 구원하기 때문이다. 만약 늑대에게 종교가 있다면, 바로 이런 교리를 들려줄 것이다.